보건타임즈 : “나는 한국에서 새 희망 얻었다 ”

마다가스카르의 인 진 로저(48세), 케냐의 섀드락(3세) 페이스(12세), 베트남의 반타이(36세), 캄보디아의 락스메이(13세). 몽골의 단다르바타르(36세), 캄보디아의 솜퍼(16세).

이들 5개국 7명의 해외 환자가 세브란스병원에서 무료 수술을 받고 새 희망을 얻었다.
이들은 세브란스병원이 작년 창립 125주년 맞아 ‘글로벌 세브란스, 글로벌 체리티(Global Severance, Global Charity)’ 사업의 일환으로 무료 수술준비를 하고 지난 2월부터 마다가스카르, 케냐,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등 5개국 7명의 해외 빈곤 환자를 초청해 수술했다.

이중 마다가스카르 인 진 로저(48세)는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경섬유종 환자로 죄를 짓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을 피해 숨어 살았다.
오른쪽 얼굴에 생긴 큰 종양 때문이다.
종양은 울룩불룩 거대해져 얼굴을 뒤덮고 축 늘어졌다.

사람들은 호기심과 동정, 무관심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때문에 그는 늘 상처 받았다.
현지사람들은 그 병을 ‘신의 저주’라고 했다.
아내와 가족도 모두 등을 돌렸다.
그는 마을 밖에 은신처를 두고 홀로 살아가는 길을 택해 살아왔다.

그런 진 로저 씨에게 새 희망이 생겼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이 ‘글로벌 세브란스, 글로벌 체리티(Global Severance, Global Charity)’ 사업으로 그에게 무료로 수술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 지난 5월 한국을 찾아 무사히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붓기만 빠지면 사람을 만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는 부푼 희망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단다르바타르

케냐의 섀드락(3세)은 지난 2월 선천성 심장기형인 팔로씨4증후군, 페이스(12세)은 심장질환 중 양대혈관우심실기시로 함께 한국을 찾았다.

반타이(36세, 베트남) 씨는 다발성 간내담관결석, 솜퍼(16세, 캄보디아)는 결핵성 관절염으로 인한 족부 기형, 락스메이(13세, 캄보디아)는 뇌성마비로 생긴 기형으로 지난 3월 입국해 수술을 받았다.
단다르바타르(36세, 몽골) 씨는 지난 4월 고관절염으로 수술을 받고 희망을 갖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솜퍼 양은 수술을 해도 하지마비가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수술 후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할 힘든 수술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모든 치료 과정을 이겨내고 제일 마지막으로 퇴원했다.

솜퍼 양은 지난 6월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의료봉사팀이 캄보디아를 찾았을 때 크게 호전된 모습으로 봉사팀을 맞았다고 전해졌다.

세브란스병원은 이들 환자들의 진료비뿐만 아니라 항공편, 국내 체류비를 포함한 모든 경비를 지원했고, 이들은 수술 후 나들이를 통해 한국을 소개하고 추억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또 기념품과 함께 의료진, 같은 병동 환자들의 응원이 담긴 메시지도 전달해 환자들을 격려했다.

락스메이

또 세브란스병원은 의료진은 한국에서 수술뿐만 아니라 이후의 예후에도 신경 썼다.
다리에 철심을 박은 락스메이가 캄보디아에서 철심 제거가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현지로 가 철심을 제거하기도 했다.

환자들도 손수 적은 감사 편지 등으로 세브란스병원과 의료진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진 로저 씨는 “그 동안 늘 숨어서 살았지만 이제는 웃음 지으며 바깥세상으로 나가려 한다”면서 “식사를 안해도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은 이번 사업을 마무리한 후 최근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세브란스병원 아트스페이스에서 지난달 29일부터 2일까지 전시됐다.

박용원 세브란스병원장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며 “7명으로 시작했지만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환자사연

우리는 한국에서 새희망을 얻었다

먼 길을 동행한다는 것 - 페이스

케냐에 의료봉사를 갔던 세브란스 팀이 현지교회에서 페이스 가족을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의 행색이 너무 초라했던 까닭이다. 치료 대상자로 선정된 페이스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가족의 형편은 몹시 어려워보였다.
가족은 세계 최대 빈민가라는 나이로비 인근 키베라에 살고 있다. 여의도만한 크기의 그곳은 백만 명이 거주할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다. 수도와 전기, 화장실 같은 시설이 전무해 오폐수로 넘쳐나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한다. 절망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페이스는 여린 심장을 움켜쥐며 살았다. 그러나 우리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들이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사실을.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왔구나, 반갑게 환영하며 페이스 가족과 첫인사를 나누었다. 가족들의 옷부터 챙겨 입혀야할 것 같아 시내 백화점에 가서 옷을 골라 주었다.
페이스는 단순 양대혈관우심실기시(Simple DORV)라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의료 환경이 좋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을 십여 년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수줍음이 많은 소녀 페이스는 수술을 받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라는 말에 고개를 들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다른 남매들을 돌보느라 때문에 케냐에 남고 아버지가 어린 딸과 서울로 떠나기로 했다. 드디어 비행기를 타던 날, 케냐와 한국을 잇는 긴 길을 부녀와 함께 하며 우리는 ‘동행’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공항시스템을 모르는 페이스의 아버지는 2미터가 넘는 긴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다. 어렸을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온 그는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예상대로 지팡이는 보안검색에 걸리고 말았다. 공항에서 보관해줄지 알 수도 없고, 무엇보다 몸의 일부분이 된 지팡이를 빼앗기면 속수무책이었다. 우리가 상황을 잘 설명해서 일은 잘해결지만 경유지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페이스와 아버지는 우리를 전적으로 의지했다. 신뢰로 가득 넘치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그는 12세 소녀의 아버지이지만 이제 28살, 한창 청춘의 나이였다. 소아마비 때문에 평생 불편한 다리를 끌고 다녔다. 조혼도 불편한 몸도 아픈 딸도 선택이 아닌 주어진 운명이었다. 희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채 살아왔던 그였다. 그런데 딸이 수술을 받게 되다니, 아비로서 제 몸 고쳐준다는 말보다 천 배는 기뻤다. 이렇게 극적인 일은 처음이었다. 그는 세브란스팀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믿음은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그의 가슴을 적셨다.
페이스의 수술은 잘 끝났고 심장은 정상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한국에 오기 전만해도 수줍어서 아버지 등 뒤에 숨었던 소녀는 눈이 마주치면 함박웃음을 지었다. 걷거나 뛰어도 숨이 차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소녀의 웃는 모습이 마치 세상이 미소 짓는 것 같아서 우리는 자주 병실을 찾아가 페이스를 들여다보곤 했다.
페이스 아버지의 아픈 다리도 검사를 했다. 완치는 불가능했지만 보정기와 꾸준한 재활치료를 받으면 호전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케냐에서는 지속적인 관리가 불가능한 터라 보정기만 맞춰주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보정기를 놓고 결국 지팡이를 다시 들었다. 보정기가 익숙하지 않아 자꾸만 미끄러지는 통에 몸에 익은 지팡이를 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최선을 다해도 닿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사랑이 있었음을 페이스 부녀는 알고 있으리라.
케냐에서 온 페이스와 섀드락을 위해 롯데월드에 갔던 날, 주인공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아이들의 부모님들이었다. 그들은 놀이동산에 한눈에 반해 간호사들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각종 롤러코스터를 타고 즐거워했다는 후문이다. 풍습에 따라 조혼을 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이십대 중후반이니 얼마나 재미있을 나이인가! 아이들은 물론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동심의 한때를 선사해주었다니, 롯데월드에서 일일 부모가 된 우리들도 마냥 뿌듯하기만 했다.

천사, 다녀가다-섀드락

우리는 섀드락(3)을 처음 만난 순간을 잊지 못한다. 추위가 절정이던 2월 초, 섀드락과 어머니가 어린이병원에 찾아왔다. 병동 공사가 끝나고 이사하느라 분주한 어느 날이었다. 아이를 맞을 겨를도 없이 병실에서 잔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겨울밤, 전등은 꺼져 있었고, 시차적응 중일 테니 깨우면 안되겠다 싶어서 살며시 커튼을 열어보았는데 아아, 그때 우리는 천사의 눈을 보았다. 캄캄한 병실에서 맑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별빛 같은 눈동자의 주인공은 바로 섀드락이었다. 한국 아이라면 피부가 하얘서 얼굴 윤곽이 보였을 텐데 검은 피부의 케냐 소년이라 눈만 보였던 것이다! 절로 미소가 번졌다. 너무나 맑고 선한, 보는 이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눈이었다.
섀드락은 팔로씨4증후군이라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심장과 혈관의 네 군데가 비정상적으로 만들어져 생기는 심장기형이다. 호흡이 가쁘고 감기나 기관지염, 폐렴에 잘 걸리며 손톱과 입술이 파래지는 청색증을 보인다. 진작 수술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으련만 몸도 몸이지만 더욱 아픈 건 마음이었다. 섀드락의 병을 알게 된 아버지가 멀리 떠나버린 것이다. 남편을 원망하며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울었다. 세탁 일을 하며 한 달에 5,6만원의 수입으로 겨우 끼니를 잇는 처지에 수술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의 세브란스 병원에서섀드락을 고쳐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야기는 꿈이 아니었다. 섀드락은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기침을 달고 살던 아이가 한 달여간의 입원생
활을 마칠 무렵에는 병원 복도를 씽씽 뛰어다녔다.
가난한 나라에 피부색도 다르니 섀드락과 같은 병실을 쓰는 한국인 어린이나 보호자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개구쟁이 섀드락에게 반했다. 섀드락은 인기스타였다. 소년은 사랑의 천사처럼 편견과 벽을 무너뜨리며 병실과 복도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섀드락과 한국아이들은 통역도 없이 어울려 온종일 재잘거렸다. 천사의 미소가 보고 싶어서 섀드락이 복도에 나타나면 누구나 말을 건넸다. 케냐에서는 냉장고가 없어서 신선식품을 먹을 일이 없었던 섀드락 모자에게 과일과 채소는 늘 생소하기만 했다, 그래서 병원에서 공급되는 과일은 친구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냉장고를 열어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주었다. 섀드락이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신발과 옷, 장난감을 한아름 선물해주었다. 마치 70년대의 시골마을처럼 날마다 정겨운 풍경이 펼쳐졌다.
환송식에서 어머니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감동의 눈물이라 하기에 설움에 겨워 쏟아내는 울음에 당황하고 말았다, 혹시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서운함이 있었던가. 그녀는 눈물의 이유가 ‘돌아가기 싫어서’라고 말했다. 두 모자가 마음을 열게 된 계기는 바로 ‘터치touch’였다. 케냐에서는 어떤 의료인도 맨 손으로 아들을 만지지 않았다고 한다. 열을 재거나 일으켜주는 일상적인 접촉 시에도 장갑을 꼈다고. 그런데 이곳의 선생님들은 늘 따뜻한 손으로 아들을 어루만져주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케냐에서는 아이가 너무 아파 의료진을 불렀지만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부르는 즉시, 지체 없이 달려와 주었다고 했다.
볼 수 없다 해도 진실한 사랑은 하늘의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만나게 된 것, 천사 섀드락이 선사해준 행복한 나날들, 지금도 여전한 이 그리움까지 모든 일이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사건이다. 이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분께서 불어넣어주신 사랑의 기적이다. 우리가 나눈 사랑은 마음밭에 잘 뿌려진 씨앗이 될 것이다. 케냐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랑이 있음을, 사랑의 주인은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 - 진 로저

그는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을 피해 숨어 살았다. ‘죄 없는 도망자’의 인생을 살게 된 건 얼굴 때문이었다. 로저는 신경섬유종 환자이다. 그의 오른쪽 얼굴에는 커다란 종양이 있었다. 종양은 얼굴을 뒤덮은 정도가 아니라 울룩불룩 거대하게 자라 축 늘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그를 보면 처음에는 외면했다가 슬쩍 돌아보고 눈이 마주칠까 다시 눈길을 거두게 된다. 호기심과 동정, 무관심이 뒤섞인 그 시선에 로저는 늘 상처를 받았다.
남들처럼 평범한 얼굴로 태어난 그였다. 그런데 20대에 우연히 기생충에 감염된 얼굴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그의 병을 ‘신의 저주’라고 했다. 아내는 떠났고 가족은 등을 돌렸다. 얼굴과 마음이 모두 무너진 그는 마을 밖에 은신처를 두고 홀로 살아왔다. 도무지 웃을 일이 없던 그의 얼굴은 화석처럼 굳어져만 갔다. 그렇게 이십 여 년을 살았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 사는 게 곧 지옥이었다.
로저는 자신의 집에 찾아온 선교사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선교사님의 편견 없는 사랑에 감화되었다. 복음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남다른 외모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평신도 신학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십여 년만의 외출이었다. 눈물겨운 발걸음에 동료들은 뜨거운 박수를 쳐주었다. 그는 그늘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옅은 미소가 번져 나왔다. 묶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가다니, 그 자체가 기적이 아닌가. 그러던 중 진정 놀라운 기적의 소식이 날아왔다. 한국의 병원에서 얼굴을 치료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기쁜 마음 끝에 한 자락 의문이 들었다. 한국의 병원은 어떤 곳일까. 왜 나를 도와주려 하는 걸까. 로저 씨는 깨닫게 되었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지난 5월 로저 씨와 그의 친구가 한국에 입국했다. 이전에 마다가스카르에서 한 차례 받았던 수술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의료진은 수술의 부작용을 세심하게 살피며 수술에 만전을 기했다. 얼굴의 거대한 종양을 제거한 후 쳐진 피부를 끌어올리고 인공근막을 삽입했다. 3,40 퍼센트 정도 붓기만 빠지면 사람을 만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성공적인 수술이었다. 환송회이 열리던 날, 로저는 미소 짓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올 당시와 지금의 얼굴이 너무 달라 출국할 때 공항에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농담을 했다.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미소가 아니라 모두의 가슴 속에 새겨질 영원한 미소였다. 그에게 미소를 찾아주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돌보고 기도하며 위로해주었던가.
그러니 그의 얼굴은 신의 저주가 아니라 사랑의 증거이다. 하나님과 로저, 세브란스가 함께 나눈 뭉클한 사랑의 증거. 떠나기 전, 로저 씨는 우리에게 편지를 남겼다. 편지를 쓰며 아마 그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를 읽는 내내 우리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 로저 씨의 편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동안 늘 숨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웃음 지으며 바깥세상으로 나가려 합니다. 모든 것이 얼마나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이며 놀라운 선물인지요.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외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먼저 세브란스 병원에게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으로 세브란스 병원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들은 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라보시고 돌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은사와 놀라운 달란트와 기술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병실을 청소해주시고 맛있는 식사를 제공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여러분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을 마다가스카르에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아주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며!

우리들의 새로운 희망 - 솜퍼

열여섯 살 소녀 솜퍼는 척추와 관절의 내상으로 허리를 펴지도, 걷지도 못했다. 세 살 때 집에 쌓아둔 목재에 허리를 다쳐 결핵성 척추염을 앓게 되었다. 그날부터 굽기 시작한 등이 지금은 45도까지 기울었다. 결핵성 관절염 때문에 걸을 때는 발등의 옆면을 디디며 기다시피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발은 더 심하게 변형되어 걸음은 더욱 힘겨워지기만 했다.
솜퍼는 점점 침울한 아이가 되어갔다. 작년에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2011년 4월, 선교사님께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를 해주겠다는 소식을 듣고, 솜퍼와 그의 아버지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한국에 찾아왔다.
족관절수술은 단번에 결정되었다. 수술 후에는 관절이 더 이상 손상되지 않으며 발바닥을 디뎌 걸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허리수술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마비라는 후유증이 올지 몰라서 의료진의 고민이 깊었다. 하지만 낫처럼 꺾인 허리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족관절수술을 받아 당장 걸을 수 있다고 해도, 저대로 허리를 방치한다면 서른 살이 넘으면 자연스럽게 하지마비가 올 터였다. 신중한 논의 끝에 허리수술을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하지마비가 오더라도 꾸준한 재활치료로 걸을 수도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수술을 받고난 뒤에도 기적적으로 하지마비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허리수술은 잘 되었지만 예상대로 하지마비가 찾아왔다. 허리와 다리가 모두 회복되는 최선의 결과를 소망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차선의 결과를 얻게 되었다. 애써 웃고 있어도 소녀의 얼굴에서 상심한 빛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의료진은 또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그런데 기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연약한 인간이 힘을 발휘하고, 낙담을 거두고 서로를 위로하는 마음이라는 기적.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말에 솜퍼가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는 꿈도 들려주었다. 언젠가 다시한국에 오겠다고, 그때는 건강한 몸으로 사람들을 만나러 오겠다는 말도 했다.
환송회가 열리던 날, 솜퍼와 아버지는 우리에게 이 같은 편지를 들려주었다. 지난여름,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에서 캄보디아에 의료 진료를 떠났다. 거기서 솜퍼를 만난 우리는 깜짝 놀랐다. 몇 달 전에 비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호전된 것이다!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먼 희망이 아니라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솜퍼가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었다.
몇 달 동안 얼마나 열심히 재활훈련을 했을지 생각만으로도 코끝이 찡해진다. 이것은 우리와 솜퍼가 나눈 러브 스토리의 에필로그 같은 이야기이다. 아니, 에필로그가 아니라 이제 시작된 긴 이야기의 서막인지도 모른다.
<솜퍼 아버지의 편지>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분들이 최선을 다해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은혜에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저는 폴 포트 치하의 캄보디아에서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처참한 현실 속에서 희망 없이 살던 중 창세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분을 믿게 된 가장 큰 이유를 바로 이곳, 세브란스에 와 서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의 모습 속에 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난 해, 저는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홀로 아홉 명의 자녀를 돌보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솜퍼가 세브란 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기적을 통해, 결코 저의 힘으로 아이들을 양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오직 저의 믿음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혼신을 다해 치료해주신 선생님들 께 제 모든 것을 다해 감 사 드립니다.
<솜퍼의 편지>
밤낮 없이 저를 돌봐주신 선생님들, 감사드립니다. 저뿐만 아니라 병동에 입원 한 어린이들을 위해 애쓰시는 모습도 잊지 못할 것입니 다 . 항공료, 수술비 , 입원비와 약값까지 모든 것을 허락하신 세브란스 병원에게 감사드립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 해 주세요. 캄보디아로 돌아간 뒤 혼자 대소변을 가릴 수 있었으면 좋겠 습니다. 열심히 재활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부디 혼자 걸을 수 있도록 기도 해 주세요. 저 또한 세브란스가 지금처럼 저와 같은 이방인들의 영혼을 구원하 는 병원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생명의 강은 흐른다 - 단다르바타르

단다르바타르 씨 부부는 영락없는 한 쌍의 잉꼬다. 결혼한 지 15년이 되어간다는데 막 혼인신고를 마친 신혼부부처럼 깨가 쏟아진다. 뭐가 그리 좋은지 부부를 만날 때마다 하하 호호 마냥 즐거워 보인다.
그들의 사랑이 더욱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지난한 괴로움 속에서도 한결같은 사랑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단다르바타르 씨는 15년째 고관절염을 앓고 있었다. 스무 살도 안 되었을 무렵 발병한 병은 삼십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한시도 통증에서 그를 놓아준 적이 없었다.
제때 치료하지 못한 관절은 다리를 절을 정도로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그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다. 단다르바트르 씨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인공 고관절 치환술’을 받아야 했다. 이는 함몰된 고관절을 대치기구로 교환해주는 수술인데 의술이 낙후된 몽골에서는 시행할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형편상 수술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이대로 두면 수술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방법이 없어 침상만 지켰다.
그렇게 살아온 지 십 수 년, 한창 자랄 나이의 아들딸을 보면 아비로서 해준 게 없어서 늘 미안하기만 했다. 그 오랜 세월, 아내는 언제나 남편 곁을 지켰다. 그녀는 집안의 가장으로 경제와 살림, 육아를 책임져왔다. 장애인 정부보조를 신청한 상태인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15년, 부르면 가슴이 벅찬, ‘세월’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긴 시간이다.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젊은 날들을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데 바쳤다. 시간은 한꺼번에 흐르지 않는다. 그녀가 남편을 부축하고 다리를 주무르며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1초 1초를 정확히 세며, 순간순간 엄숙하게 흐른다. 하지만 그녀는 웃음 짓고 있었다. 해맑고 순진한 촌부의 그것이면서도 거대한 힘이 느껴지는 신비로운 미소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1994년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을 품고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어요. 힘들었지만 행복이 더 큽니다. 신앙이 가족을 하나 되게 해주었지요.”
남편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가족이 웃음을 잃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살아왔는데 세브란스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족이 섬기고 있는 베이직 교회의 선교사님을 통해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남편의 무릎을 치료해주겠다는 소식이었다. 부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구한 것보다 더 큰 응답을, 기대한 것보다 더한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얼마나 기다려온 시간이었던가. 한국 환자라면 검사에 따르는 부담이나 수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있겠지만 부부는 그런 시간조차도 행복했다.
매순간이 감사하고 놀라웠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술일, 그런데 수술을 받는 도중 과다 출혈이 일어났다. 의료진은 민첩하게 수혈을 했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회복실에서 깨어난 후 단다르바타르 씨는 이와 같이 말했다. “내 몸에 한국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그 피가 저를 살렸습니다. 저는 이제 반은 한국인입니다.” 그는 이제 고통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몽골에 돌아가면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남다른 각오를 보였다. 하나님께서 부부의 흠결 없는 사랑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고 기억하셨음에 틀림없다.
단다르바타르 씨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몇 달이 지난 7월에 우리는 그가 보낸 선물을 받았다. 한여름에 보기만 해도 온몸이 따뜻해지는(?) 그것은 몽골산 양모로 짠 머플러와 장갑이었다.(이번 겨울은 추위 걱정 없이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몽골인의 피와 한국인의 피가 만나 그의 몸속에는 새로운 생명의 강이 흐르고 있다. 부부의 모진 세월을 끌어안고, 국경과 인종, 언어를 뛰어넘은 채 흘러 마침내 우리를 기쁨의 바다로 이끈 생명수, 그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지난 봄에 찍었던, 단다르바타르 씨의 사진을 본다. 둥근 얼굴과 양간 벌어진 미간하며, 그러고 보니 원래 얼굴이 한국인을 닮은 듯하다.

우리는 해결사, 널 위해서라면 - 락스메이

락스메이와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한 사람을 얼마나 극진히 보살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락스메이가 오간 길은 해프닝의 연속이었고, 소년은 여러 사람의 각별한 수고 끝에 귀빈급(?) 예우를 받으며 귀향했다.
캄보디아 출국비자를 받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현지 대사관 측에서 요청하는 비자관련 서류들이 유난히 복잡하다 싶었는데 급기야 락스메이가 한국으로 출국하는 당일 갑작스럽게 보안서류를 요청했다. 이륙 시간이 지척인지라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외근 중이던 담당자는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와 서류들을 정리해 현지 대사관 퇴근 직전에 팩스를 보냈고, 출발 30분 전에 비자가 나와서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지난 3월, 인천공항에 내린 락스메이는 지치고 곤한 모습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아온 탓에 온몸이 강직된 상태였다. 특히 종아리가 많이 강직된 탓에 소년은 무릎을 디뎌서 걷고 있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데다 몸도 시선도 천천히 움직여 의사소통이 힘들었지만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소년이 ‘자기’라는 성 안에 갇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기를 얼마나 간절히소원하는지.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소년을 두고 떠났다. 경찰인 삼촌 가족과 살고 있는데 자신이 짐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늘 무거웠다. 고마운 삼촌 가족을 위해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였다. 학교에서 들었던 복음에 의지해 사랑이신 예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다. 소년은 날마다 두 손을 모았다. 삼촌과 숙모, 사촌동생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그리고 언젠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기를.
소년의 열세 살 인생은 뜻밖에 밝고 씩씩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아이들과 한반에서 공부하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뛰고 앉고 달리는 아이들, 아이들의 한 걸음이 락스메이에게는 바위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이나 힘겨웠다. 그러나 소년은 무릎걸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뛰었다. 비록 육신은 무겁지만 마음은 새처럼 날고 싶었으므로. 그런데 무릎걸음이 독이 될 줄은 몰랐다. 무릎에 무리를 주어서 관절이 처참하게 뒤틀리고 뭉개졌던 것이다. 더 진행될 경우 그나마 걷는 것마저도 불가능해진다고 했다. 그런데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께 기쁜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무릎 부위와 종아리 근육은 심하게 위축되지 않아 수술 후 재활치료를 받으면 다른 아이들처럼 걸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수술 결과는 최상이었다. 다리에 철심을 박자 굳어진 종아리가 펴지고 무릎을 써서 일어게 되었다. 물리치료를 했더니 하루가 다르게 걸음걸이가 안정되어 갔다. 이제 돌아가서 하던 대로 걷기 연습만 하면 정상적인 보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리 모양이 잡힐 때까지 철심을 고정시켜 두었다가 몇 달 뒤 제거수술만 하면 된다. 그 수술은 캄보디아에서 가능하리라는 판단했고 락스메이는 정든 한국을 떠나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
귀국일이 정해지고 비행기 티켓팅을 마친 어느 날, 불현듯 락스메이가 이코노미 좌석에 앉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각이 일었다. 철심을 박았으니 무릎을 구부릴 수 없고 좌석이 당연히 비좁지 않겠는가. 방법은 단 하나. 평범한 사람은 평생 한 번 타볼까 말까한 그 자리, 비즈니스석으로 재발권을 했다.(보호자 좌석과 추가분까지 세 좌석을 끊었다!) 만약 우리의 아들딸이 그 같은 상황이라면 비즈니스석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예수님이 락스메이를 우리에게 보내셨으니, 그 아이는 우리의 자녀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생명이다.
한편 천국의 왕자님, 락스메이를 돌보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년이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캄보디아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쪽 기술로 철심 제거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우리가 꺼낸 카드는 ‘직접 그곳으로 찾아가 수술하기’였다. 지난 7월, 어린이 병원에서 의료봉사 차 캄보디아에 갔는데 락스메이의 주치의 선생님도 전격적으로 합류하신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온 세상을 모두 다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락스메이를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 그 아이를 돌봄으로써 세상을 껴안는다는 거대하고 뜨거운 마음을 알게 되었다.

눈빛으로 말하다 - 반타이

반 타이 씨는 베트남 사람이라 나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사회복지과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개교 125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선교사님의 추천을 받아 3월초에 한국에 왔다고 했다. 그게 다였다. 그가 36세이고 가난한 농부라는 사실 뿐, 결혼을 했는지 가족은 누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 타이 씨는 단신으로 한국에 왔으며 그를 추천한 선교사님은 베트남에 계시고, 그를 도와줄 베트남어 통역사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나는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와 환자로 몇 주를 만났다. 그런데 눈빛만으로 대화하고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반 타이 씨의 병은 다발성의 간내담관결석, 간(肝) 속(內)의 담관(膽管)에 돌(結石)이 생기는 질환이다. 한두 개가 아니고 한두 곳도 아니며 한 번 없애주면 다시는 안 생기는 깨끗한 돌이 아니라 여러 군데에 여러 개가 생기고 또 두고두고 다시 생기는 경향이 있다. 그는 일차적으로 외과 수술을 시행했지만 잔류 담석이 있어 수차례 내시경으로 담석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런 상태라는 사실을 시원하게 설명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눈빛을 보면 안다. 그는 언어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는 육체의 고통이나 외로움을 호소할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국땅이다. 평안을 유지하려면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 그것이 낯선 타인일지라도. 아마도 그는 하나님을 그리고 나를 의지하고 있으리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 그가 건네는 전적인 신뢰는 나를 뭉클하게 했다.
반 타이 씨의 베트남어 중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마디가 있었으니, ‘따오’였다. 내시경 시술 중에 그가 늘 반복했던 말로, ‘아프다’는 뜻이었다. 내시경 기기를 간속 담도로 깊게 넣어서 담석을 부순 다음 제거해야 하는 아픈 시술이다. 여기서 ‘따오’는 의성어라기보다 의태어에 가깝다. 너무 아프니까 입술에서 저절로 새어나오는 신음이다. 그는 혼자였다. ‘따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의료진뿐이었다. 나는 그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듯 최선을 다했고, 다섯 차례에 걸친 긴 시술을 통하여 담석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백 개가 넘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나왔다.
환송회에서 보았던 반 타이 씨의 환한 얼굴과 미소가 어른거린다. 반 타이 씨와 나는 베트남인과 한국인으로, 의사와 환자로 만났다. 이는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세계라는 행렬 속에서 그와 내가 만나 작지만 의미 있는 하나의 좌표를 이룬 게 아닐까. 나는 베트남이라는 나라에 대해 빚진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과거 우리나라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베트남 국민에게 저지른 과오 때문이다.
국가에 의해 발생된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잊혀지거나 치유되지는 않는다. 역사의 치부를 감추고 호도하기에 급급한 이웃나라가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함께 아파하고 보살피는 나라, 그보다 먼저 그런 마음을 지닌 개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반 타이 씨로 인해 일상에 젖은 좁은 시야가 한 계단 올라서 조금은 더 넓어진 것 같았다. 반 타이라는 ‘좌표’를 통해 나는 세계를 본 것이다. 우리가 만난 ‘지점’에는 ‘언어를초월한 눈빛의 공감’이 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의 질병은 난치성이라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현재 담석을 제거했지만 앞으로 하나둘씩 돌들이 생겨 그의 몸을 누를 것이다. 언어상 이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가 없었는데 그는 완치가 되었다고 믿으며 고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물론 선교사님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겠지만 의사에게 직접 듣는 편이 그를 덜 낙담시켰으리라. 부푼 희망이 꺼지는 순간의 그를 생각하니 안쓰럽다. 앞으로 그를 다시 만나게 될지 아닐지 알 수 없다. 다시 생겨난 돌들로 베트남 어딘가에서 ‘따오’라고 새처럼 울지도모르겠다. 그를 생각하는 안타까움을 잊으며 살고 싶지 않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그가 아프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 이 글은 주치의 소화기내과 박승우 교수의 글이다.

환자의 사연들
http://www.bktimes.net/bbs_detail.php?bbs_num=172&tb=board_notice&b_category=&id=&pg=1

먼 길을 동행한다는 것 - 페이스
천사, 다녀가다-섀드락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 - 진 로저
우리들의 새로운 희망 - 솜퍼
생명의 강은 흐른다 - 단다르바타르
우리는 해결사, 널 위해서라면 - 락스메이
눈빛으로 말하다 - 반타이